그것은 우리나라 최강 대통령 후보인 민주투사 김대중 선생이 전라인이었기 때문이다. 호남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분위기가 그러하였고, 세계 여론도 마찬가지로 앞으로 한국 대통령은 김대중 씨라고 말하고 있었다.
세계 각국 사람들 중에는 한국 이름은 몰라도 민주투사 “김대중”이란 이름은 알고 있다는 것을 교포들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느닷없이 계엄령이 선포되고 전두환 보안 사령관이 계엄사령관이 되자마자 김대중 선생을 구속해 버렸다.
이에 충격을 받고 낙심천만한 광주시민들은 “김대중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가두행진을 시작했다. 계엄사령부는 초전박살로 데모의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원칙을 세워 놓고 총칼로 잔악무도하게 대모 군중들을 구타, 학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우리나라 국군이 우리 국민을 죽이고 있다”고 목숨 걸고 일어난 것이 광주 5.18 의거인 것이다. 분노한 시민들은 학생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과 김밥을 가져다주던 여자들까지 데모를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대규모 사망자, 부상자가 발생하여 크게 확산되어 버린 것이 바로 광주 5.18 의거 직접 원인이었다.
당시 소문에는 군인들 입에서 술 냄새가 나고 있었고 우리나라 국군이 우리 국민을 죽이고 있다는 말이 급속도로 퍼졌고, 이어서 절망으로 충격 받은 시민들은 너나없이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왔다.
계엄군은 시민들을 보는 대로 무자비하게 폭행, 학살을 자행했다. 단군 이래 최초로 호남에서 왕이 탄생될 것이라고 믿고 있던 광주시민들의 충격과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럴수록 계엄군은 폭행, 학살로 무자비하게 맞섰던 것이다.
이러한 데모 기간 동안 광주, 목포시내 은행과 각 급 공공기관이 사람 없이 밤낮으로 비어 있었지만 조그만 도난 사건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던 것만 보아도 얼마나 시민들이 분노로 경양되어 있었는지 짐작 가는 일이다. 생사가 문제이지 살림살이가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후 김대중 선생은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죽음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사실 김대중 선생이 시킨 일도 아니고 분노한 광주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들고 있어났던 것인데 계엄사에서는 김대중 선생이 시켜서 광주 5.18 의거가 일어났다고 밀어붙였던 것이다.
나중에 김영삼 대통령 문민정부가 들어서게 되고 전두환, 노태우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고 민주화 투쟁이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광주 5.·8 의거 희생자 국립묘지는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엄청난 규모로 건설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바로 본인의 일이고 국가를 편파적으로, 보복적으로 운영, 집행하여서는 안 된다는 원칙적인 정신철학으로 인해서 광주 5.18 의거 국립묘지 건설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다.
<호남타임즈 2019년 5월 9일자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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