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덕근 호남타임즈 편집인<교육학박사>“이름을 기리는 社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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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근 호남타임즈 편집인<교육학박사>“이름을 기리는 社會”
  • 문덕근 기자
  • 승인 2017.11.15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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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덕근 편집인.
삼라만상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은 아마 이름일 것이다.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동서양이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절대의 세계는 말과 글로 나타낼 수 없기에 ‘以心傳心’이라는 말이 생겨났지만 相對의 세계에서는 記憶하고 기리기 위해 이름을 짓는 것이었으리라.

우리가 이름을 갖게 된 연유를 한자에서 살펴보면 ‘이름 名’이라는 글자는 낮에는 얼굴을 구별할 수 있었는데, 저녁이 되자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까 누가 오고 안 왔는지 구별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夕(저녁 석)+口(입 구)의 합체자로 ‘저녁이 되자 입으로 이름을 불러 확인’하려고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케네디 空港이나 루스벨트街, 서울의 乙支路, 島山路니 하는 길거리 이름도 後世 사람들이 특히 역사적인 이름을 오래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름은 사람이나 사물을 대변한다. 그래서 인사발령 시기가 되면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기관장으로 온다는 이름만 보고도 그 기관의 미래를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이라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매우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인간의 언어 시작 또한 사물이나 인간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부터 시작했으리라.

많은 사람들이 저물어가는 나라에 절망하고 있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을 이야기했던 한 청년인 도산 안창호 선생은 그의 첫아들에게 지어준 필립(必立)이라는 이름은 조국을 반드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는 역사에 기록된 사람의 이름을 보면서 손에 불끈 힘을 쥐면서 “나도 저처럼 되리라”하는 희망의 경험 아니면 “배웠다고 하는 사람이 왜 그랬을까?”하고 힘이 빠지면서 이름값도 못한다고 생각한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의 이름이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私心을 버리고 公心으로 살았다는 삶의 가치를 국민의 이름으로 훈장을 드리는 것이리라.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가치 있는 삶을 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 같은 이름을 갖고서 빛나는 이름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이름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름에는 부모, 온 가족의 희망이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김소월이 ‘招魂’이란 시에서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라고 절규한 것도 이름과 생명을 똑같은 비중으로 다룬 것이라 할 것이다. 특히 중국이나 한국 사람의 이름에는 깊은 철학과 운명이 나타나 있다.

가르침이란 어쩌면 후세들에게 좋은 이름을 남기도록 마음을 다잡고 행동으로 옮기는 최고의 값있는 어른들의 일일지도 모른다. 또한 배우는 사람이 “나도 저 분처럼 되어야지”하고 다짐을 하게 하는 과정은 아닌가? 그저 남의 이론이나 먼저 읽은 것을 전달해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무나 돌에도 무늬가 있듯이 사람의 말과 행동에도 무늬가 있다. 가르침은 제자들로 하여금 진리에 도달하도록 하는 데 있다. 가르침의 내용을 실천할 수 있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란 그 속에 사는 어른들의 모습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아이들은 어른들이 소중히 여기는 사물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무의식적으로 몸에 익히는 것이다. 그럼 어른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사는 모습은 아닐까? 자신이 살아온 삶을 떳떳하게 이야기 할 수 있고,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외국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여서 우리의 것을 세계의 것으로 만드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혹시나 외국에서 공부했던 것을 자랑하고 그 문물의 우수성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혹시나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것을 폄하하는 일은 없었는가?

더 나아가 우리 후세들에게 事大主義 사고를 주입하게 한 일은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아이들이 우리말을 배우는 것보다 외국말을 먼저 배우게 하고, 거기에서 외국의 것이 우수하다는 잘못된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일은 없었는가? 대화 중간에 영어를 섞어서 사용하면 많이 배운 사람이라는 태도를 부추기는 일을 하지는 않았는가?

이름이라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요소다. 우선 개인적으로는 ‘나’라는 존재가 다른 존재로부터 구분되게 해줌으로써 ‘자아’를 부여하게 한다. 그래서 이름은 인간에게는 거룩하고 무거운 과제라고 이규호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남이 아닌 본인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있는가? 학교에서는 이름을 소중히 하는 행사는 있는가? 아니면 출석부는 있는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눈 맞춤을 해 본 적은 얼마나 되는가? 자신의 마을 이름과 유래를 아는가? 가슴에 기억하는 이름은 누구인가?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이 될 공부를 아니 하는가?” 하는 안창호 선생의 외침이 주는 의미를 숙고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대한다.

<목포타임즈신문 2017년 11월 15일자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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